
서구적인 것을 배격하고 아시아 특히 일본의 정체성을 추종하는 이념이 숨어 있다고 지적
한다.
이 아시아주의에 의하면 동도서기 즉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되 그 핵심은 아시아(=일본)의
것이어야 하며 청과 조선 역시도 이를 따라 힘을 합쳐 서구의 위협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과 조선은 이러한 서구의 위협에 맞설 능력도 아시아적인 것을 지켜낼 능력이나
단결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솔선수범(?!)하여 이들을 병합하여 대아시아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헉! 실사판 케산이나 배틀로얄의 대동아국가)
이를 읽어 보니 뇌피셜이기는 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 아니 대륙정벌론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유학자였던 요시다 쇼인에 있어 중화란 여진족의
청도 소중화를 자처하나 유약하기만 한(!) 조선도 아니었다. 천년 만세일계(이게 왜곡이라
는 비판은 제쳐놓고)의 신성한 권위를 가진 덴노가 다스리는 일본이야말로 중화이며 기존
중화의 왕조들(원, 청 등의 이민족 왕조 포함)이 했던 것처럼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중심에
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중화 질서라는 것 자체가 무력을 동반하지 않는 경제, 정치, 문화적인 것으로 생각하
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중국의 중화는 지속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왔다. 한반도 국가들과
의 관계에서도 고조선 멸망 후의 한사군, 당과 고구려 그 이후의 통일신라와의 충돌, 명의
여말선초 영토문제 개입 등을 보면 한족 왕조들부터가 이미 한반도 국가들에 대해 군사
적인 위협을 통한 중화를 추구했었고 이민족
왕조들은 더더욱 심했다. 아예 원은 고려에 일종의 총독부까지 둘 정도였다.
이를 보면 중화사상이란 힘(물리력)에 의외로 의존하는 사상이며 간다효 같은 사람이 최근
유튜브 동영상에서 자주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그 혼란
을 극복하기 위한 유학이 출현하고 그 유학을 이용해 당대의 집권층이 자신들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천자(황제)에 의한 중화사상을 만들어 내면서 이게 비단 국내 질서 뿐만 아
니라 국제 질서에 대한 중국인들과 그 집권층들의 인식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유학자(!) 요시다 쇼인이 보며 일본에 중화사상을 도입해 그 중화에 중국 황제가 아닌 일본 황제를 끼워넣었던 것으로 이는 중국을 지배하던 이민족 왕조
들과도 비슷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 된다. 카미카제만 해도 아시아의 중화 아니 세계의 중화(팔굉일우)인 덴노의 국체를 보위
하기 위한 희생으로 미화되었는데 이는 충신 열사 등등을 떠받드는 유교적 성향과도 많은
부분 교집합을 가진다, (늘 말하듯 이런 소위 충신열사들을 제사지내는 곳이 야스쿠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에도막부 시대 아니 전국시대 마인드로 치렀다고 지적하
는데 솔직히 전국시대라면 오히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유도리(!)가 있던 시기다. 하극상
도 잦았고 적을 옮기는 경우도 있었으며 각 영주,백성,중들 할것없이 누구 편을 드는 게 가
장 득이 되는지 각을 재던 시기이다.(그나마
유학적인 측면이 이때쯤 슬슬 침투하기 시작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 일본군은 일본 전국시대가 아닌 중화사상이 발안되던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 이후 유림의 사고에 빠져 있던 것이다. 우리가 숭앙하는 절대자(중화의 황제=일본 덴노)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 옥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바로 구 일본군의 마인
드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도 순수한 공맹 시대 유림의 그것도 아니었다. 간다효에 따르면 공맹시대에
는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를 강조하여 혼란스러운 현실을 바로잡자는 온건한
발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이후 집권층에 의해 발굴되고 이용되면서 중화사상의
기반이 된 것이다. 즉 군주가 군주다운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신하 그리고 백성이 신하, 백
성다워 군주-황제-덴노의 명을 따르는 것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효경 외에도 충경을 많이 읽는다. 효경만 읽는 조선
시대와는 대조적)

본다.
까놓고 말해 조선의 건국세력은 말이 신진사대부이지 당대 중앙관료 집단으로 고려 후기
부터 세력을 키워온 집안들 모임이다. 이들은 상당히 배타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왕의 권위를 제한하기까지 했다. 조선조가 왕권 제한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보다 민주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제한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
닌 권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차라리 황제 앞에서 황제의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직언한 여자가 살던 로마제국이
민주국가다?!)
이들 중앙관료 출신의 조선 기득권층은 누구보다도 유학을 자신들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삼았고 심각하게 가서는 유학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을 그냥 지들 목적으로 삼을 정도로
소위 유학 탈레반이라 오늘날 놀림감이 될 정도가 된다. (조광조 일당 때문!)
사실 어디까지나 유학은 정치집단의 집권 수단, 명분이어야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이
된다. 그런데 그게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냥 탈레반이 믿는 이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원래 왕 앞에서 화포의 시범을 보이는 것은 조선 초부터 국방력
감찰을 위해 실시하던 것인데 궁궐에 포를 들이는 게 상서롭지 못하다면서 화포 시범을 반
대한 사례도 있고 조광조의 경우 여진족 토벌을 위한 게릴라전에 대한 제안을 유학 이치
에 안 맞는다면서 자신의 위치와도 안맞게 쌩뚱맞게 지적하면서(오늘날로 치면 교육부장
관이 국방정책에 반기를 드는 셈?) 반대했고
당대 왕인 중종이 이를 거들어주는 쌩쑈(!)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토록 왜곡된 유학을 맹종하면서 조선은 점점 비틀린 나라가 되어간다. 병자호란에서 패
배하고 명나라가 망한 뒤 여진의 청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당시 조선 집권층은 자신들을
소중화로 자처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며 (임진왜란 당시 도운 재조지
은 운운)병자호란 이후 위협받는 집권층의 명
분을 더더욱 강화하고자 한다. 조선 후기로
가면 여성의 권리도 악화되고 경제도 노비에 더더욱 의존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상 병자호란 이후의 약화된 집권층의 권위를 계속 세우려는 유학 원리
주의 기득권층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아예 어떤 선비는 자신은 망한 명나라의 백성이라 외치기도 했다고 하는데 조선의 집권층
-상류층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조선인이 아닌 명나라인이라고 우기는 웃지도 못할 꼴이 벌
어지는 게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이후 청의 쇠퇴, 서양 세력의 침입에 조선 조정은 무력하기만 했고 결국 일제시대의 개막
으로 조선은 멸망하게 된다.
이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권에서도 어떻게든 이 현실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개화당의 과
격하기까지 한 모습이 나온다.(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의 협력을 얻고자 하는데 왠지
매국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은 조선 카톨릭교도들도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해 핍박받는
조선 가톨릭 교도들을 해방시켜 달라 했다.)
어찌 되었든 일본의 아시아주의라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본다면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중국의 중화사상의 연장선상으로 왜곡된 유학의 산물이며 여러가지 형태로 한중일 삼국에
폐해를 남긴 사상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일본의 굴레”라는 책이 있는데 어찌 보면 “한
중일의 굴레”로서 왜곡된 유학과 중화사상을 다루는 역사가가 책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ps. 영국이 개새끼면 프랑스와 러시아는 개새끼 수준이 아닌 바퀴벌레 새끼다.(……)
그런 의미에서 비스마르크 그립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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